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색깔이 진영 논리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최근 세종시 교육감 출마자 중 하나가 재직 시절 행사에 참석할 때, 넥타이 색깔을 선택하는 데 소중한 시간을 사용했다는 글귀가 하나의 사례이다. 색깔이 문제 해결이나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겠는가 싶다가도 일을 하려면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등소평은 경제 문제에 대해 의사결정 기준으로 흑묘백묘론을 제시하였다. 실사구시적 중도(中道)적인 생각이다.
작금의 세종시 교육감 후보는 어떠한지 모두 색깔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나 색깔이 정당을 반영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데 색깔을 기본으로 해서 자신의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한지 만약 필요하다면 왜 색깔이 필요한가 어떤 색깔이어야 하는가 계속해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색깔이 상징하는 교육적 가치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여야 함에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후보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편승한 것에 불과하다.
교육 문제 해결에 색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면 각 정당에서 교육감 후보를 공천하자고 합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각 당에서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이념적으로 교육이 편향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려 깊은 선배 정치인의 숭고한 취지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러 후보 스스로가 색깔을 선택하여 자칭타칭 진보 및 보수로 호칭한다. 이는 교육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소중한 많은 것을 잃게 하는 가슴 아픈 일이다.
본래 교육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므로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을 보편타당하게 적용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색깔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은 후보자의 욕심이다. 후보자의 욕심이 학문을 오염시켜 선량한 학생과 선생님의 순수한 뜻을 왜곡하는 명백한 정치 행위이다. 색깔을 이용하여 수많은 이해관계자를 구분 짓는다.
교육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색깔을 배제한 정치적 및 이념적 중립성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학교가 순수한 학문적 관점에서 정치, 경제, 사회, 전쟁 및 민족 등의 문제에 대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이 이론을 중도적 관점으로 학습하고 실천하여 세계시민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명주기에 맞는 일을 하는데 이를 직업이라고 부른다. 신생아는 먹고, 자고 싸고, 우는 것이 직업이며 유아기는 먹고, 자고, 싸고 울고, 그리고 논다. 그렇다면 학생은 공부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때 멋있어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며 그래서 그들을 칭송하게 만든다. 여름날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 흘리며 고된 일을 하고 지친 모습으로 귀가하는 농부로부터 감동을 넘어 존경스러운 것은 자기 일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막한 밀라노 동계올림픽에서 18살의 최가온 선수가 1~2회차에서 실패하고 3회차에서 최고 점수를 얻어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최가온 선수는 어린 나이에 2회 3기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가 선망하던 클로이 김(Chloe Kim) 앞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광경을 봤던 모든 사람은 최가온 선수에게 환호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금메달 자체에 대해 환호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노력에 대한 환호인 것이다. BTS 또한 전 세계의 사람을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본업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농부가 들녘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숭고하게 보이고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연습에 매진할 때 멋있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학생이 책상에서 공부하는 모습이 멋있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모두 자신의 일에 충실할 때 발생하는 반응이다. 모두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다. 농부에게는 들판이 학교이고 운동선수는 운동장이 학교이다. 따라서 학교란 단순히 유형의 건물이나 물리적 공간이 아닌 배움이 있는 장소라면 그 어디든 학교가 된다.
배움의 장소에서 다루는 학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원적 관점에서 학문이란 묻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묻는 것이다. 배움이 먼저이고 묻는 것은 다음이다. 배움은 나이, 성별, 그리고 지역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적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배움에는 장소와 시간이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초학자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성인 율곡은 학문이란 ‘이상하고 별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전제한 후 학문을 단 하나의 단어 ‘당(當; 마땅할 당)’으로 규정하였다. 마땅함의 구체적인 사항으로 오륜을 제시하였다. 율곡의 마땅함은 인간관계의 도리와 사회적 질서를 포함하는 핵심 가치이다. 계속해서 성인은 ‘지금(당대의) 사람은 학문이 일상에 있음을 모르고 행하기 어려운 것에 마음을 쓴다고’ 하였다. 율곡의 교훈은 인간이 삶에서 적용할 기본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색깔이 없으며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 목표이자 최종 목표를 제시하였을 뿐이다. 여기에 색깔을 입힌다면 학문을 오염시키고 학문의 주체인 선생님과 학생의 순수한 뜻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제 성인의 뜻을 이어받아 세종시에서는 학교의 본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인성을 함양하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만들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의사결정자를 선택할 시기이다. 성인 율곡이 지향하였던 사회를 다시금 생각해 봤으면 한다. ‘세종다운 교육’을 만들기 위해 운동장, 교실 및 연습실에서 땀 흘리는 사람이 존경받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교육감이 선출되기를 열망한다.









